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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멋진 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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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멋진 패자
  • 전민일보
  • 승인 2016.08.04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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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권(丁一權) 전 총리와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은 1917년생 동갑이다. 생일도 불과 일주일 차이다. 정일권은 박정희 정부시절 외무장관, 국무총리는 물론 국회의장까지 역임한다. 국무총리는 물론 국회의장 재임기간도 각각 5~6년에 달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동갑내기 두 사람의 출발은 완전히 역전돼 있었다는 것이다. 6·25 당시 육군 참모총장 신분이었던 정일권과 남로당 경력으로 인해 사형 당할 위기에서 간신히 살아난 박정희의 처지는 그야말로 천양지차였다. 정일권은 박정희를 부를 때 ‘야’로 지칭했다고 한다. 물론 그런 정일권을 향해 박정희는 ‘각하’를 붙여야 했다.

두 사람의 경우에서 보듯 출발이 곧 끝을 의미하진 않는다. 또한 한국만 그런 것도 아니다.

미국 에이브러햄 링컨에겐 라이벌 스티븐 더글라스가 있었다. 링컨이 4살 연상이었지만 출발은 더글라스가 빨랐다. 20대 후반에 일리노이주 국무장관과 대법원판사라는 화려한 이력을 쌓은 더글라스는 1846년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된다. 이 해 링컨은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된다.

그런데 1854년 더글라스가 발의한 법안 하나가 존재감 없던 정치인 링컨을 전국적 인물로 만들게 된다. 더글라스는 이 법안에서 기존에 북위 36도 30분 이북에서는 노예제도를 허용하지 않던 미주리 협정을 파기하고 새로 연방에 편입될 지역 주민 의사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글라스는 이 법안이 결코 노예제확대를 위한 것이 아니며 주민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링컨은 더글라스를 정면으로 이렇게 비판한다.

“이 법안은 미국의 역사적 발전에 역행하는 법안이다.”

1858년 상원의원 선거전 동안 두 사람은 7차에 걸친 토론을 펼친다. 결국 선거전에서는 더글라스가 이겼지만 노예제 반대 입장을 명확히 한 결과 남부에서의 지지를 상실한다.

이로 인해 더글라스는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선출되는 것에 실패한다. 그 다음은 우리가 역사에서 알고 있는 바다. 링컨은 대통령에 선출 된다. 그리고 미국은 곧바로 남북전쟁이란 참화에 빠져든다. 이때 스티븐 더글라스의 진면목이 나타난다.

그는 자신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겨 준 링컨에 대한 지지를 간절히 호소한다.

“나는 민주당이고 공화당인 링컨을 거부했으나 나라가 망하는 것을 방관할 수 없다.”

“대통령이 되지 못했으니 대통령 모자라도 들고 있겠다.”던 더글라스는 링컨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다 몇 주만에 과로로 사망한다. 후일 미국 사가들은 더글라스가 제시한 법안의 기초가 됐던 ‘인민주권’ 개념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것은 링컨 이후 미국 대통령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으며 미국 민주주의의 확고한 기틀로 평가받고 있다. 그 시절 우리에겐 왕이 있었다.

민주주의와 철인군주는 양립할 수 없다. “나는 군사(軍師)다.”라는 정조(正祖)의 자신감은 철인정치의 소망이자 자신감일 수는 있으나 결코 민주주의가 될 순 없기 때문이다. 개혁이 어려운 것은 반대세력이 광범위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철인군주에겐 ‘나를 따르라’만 존재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단계별로 설득하고 타협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얘기한다. “혁명보다 개혁이 어렵다.”

정일권과 박정희, 그리고 스티븐 더글라스와 에이브러햄 링컨 사이엔 무엇이 있었을까.

답은 각자의 몫이다. 다만 어렴풋이 떠올려보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한 리더가 도덕과 철학 그리고 가치의 배분까지 모든 부분에서 비장한 소명의식을 가질 때 찾아오는 것이 있다.

주변과의 고립과 억제할 수 없는 자기확신이 바로 그것이다.

민주주의가 철인군주에 의한 통치보다 나은 점은 군주의 사고가 결코 인민의 총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글라스는 비록 대통령이 되지 못했지만 미국 민주주의를 완성시키는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그리고 인민의 총의에 대한 그의 헌신은 그가 얼마나 멋진 패자인지를 웅변한다.

영화 [인터스텔라]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지구의 끝이 우리의 끝은 아니다.(The end of earth will not be the end of us)”

장상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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